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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콘텐츠는 한국 우편에 대한 역사를 소소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제목 반도상사에서 체성회로 되돌아온 우표류 해외보급
등록일 2016. 1. 5.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일화로보는 우편130년 NO.79 반도상사에서 체성회로 되돌아온 우표류 해외보급

우표는 우편요금을 납부하는 증표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와 인물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매체로서의 기능도 한다. 또한 우표는 수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 외화 벌이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표 발행국은 우표를 해외로 널리 보급하고자 노력하게 마련인데, 그러기 위해 보다 좋은 우표를 발행하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우리나라 우표의 해외 보급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미군정 시절인 1946년 체신국(체신부의 공식 명칭)은 본부 건물 내에 설치된 구내우편국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우표수집가를 대상으로 우표를 판매했다. 그것이 우표의 해외 보급의 시작이었다. 정부가 수립된 해인 1948년에는 뉴욕영사관 영사 최용근이 판매대금을 후불한다는 조건으로 체신부로부터 우표를 공급받아 미국에서 2년 동안 판매했다. 그 뒤 1950년에는 체신부 우정국과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외국인의 주문을 받아 판매하는 우표주문판매제도를 실시한 바 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UN군의 참전으로 16개국 병사가 참전하고 5개국 의료지원단이 파견되면서 한국 우표에 대한 관심을 가진 외국인 병사들이 부쩍 늘어났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정국이 안정되면서 우리나라 우표의 해외 판매가 점진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우표류의 해외 보급을 전담기관에 맡겨 전문화하기로 하고 그 대상으로 체신부 산하단체인 대한체신사업협회를 선정했다. 그리하여 1956년 12월 우표류 해외보급인제도를 채택하고 우표류 해외판매업무를 대한체신사업협회에 일임했다. 동 협회는 우표수집계의 권위자인 황우상을 기용하여 그 업무를 전담케 했다. 이듬해 6월 동 협회를 한국우표류해외매팔사무 대행자로 지정하고, 다시 1959년 4월 우표류 해외판매인으로 허가했다.

우표류 해외보급업무를 이원화하다

1964년 12월 체신부는 ‘우표류 및 수입인지의 관리판매규칙’을 개정하여 이듬해 2월 재단법인 체성회(1961년 6월 ‘대한체신사업협회’를 ‘체성회’로 개칭했다)를 해외보급인으로 허가한 데 이어 동년 3월 무역회사인 동화통상(주)을 해외보급인으로 허가함으로써 우표류의 해외보급인을 이원화했다. 해외보급인을 늘림으로써 해외 판매량을 배가시킨다는 계산에서였다. 그처럼 무역업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해외보급인으로 지정했음에도 판매 실적이 호전되지 않자, 체신부는 1968년 7월 두 해외보급인에 대하여 동시에 허가를 취소했다. 그 결과 우표의 해외 보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는데, 그 해 8월 체성회만을 단독으로 해외보급인으로 지정함에 따라 체성회가 그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1970년 8월 우표류 해외보급인을 다시 이원화했다. 우표의 해외보급을 활성화하고 외화 획득을 증대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한국우표취미협회를 해외보급인으로 추가로 지정했다. 명분은 그럴듯했으나 해외보급인의 이원화는 뜻밖의 부작용을 초래했다. 거래처가 제한된 해외시장을 놓고 양자 간에 과당경쟁을 벌이자 덤핑 판매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한국 우표의 인기가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우표류의 해외 보급 실적은 오히려 감소했다. 그러자 1973년 체신부는 한국우표취미협회의 해외보급인 지정을 취소하고 체성회로 하여금 그 업무를 전담케 했다.

그처럼 해외보급인제도가 바뀐 것은 우표류의 해외 보급이 부진했기 때문이다. 우표류의 해외 보급이 부진한 이유는 한국 우표의 품질이 낮아 인기를 끌기도 어려웠거니와 보급 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해외보급인으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체성회의 해외판매 방식은 철저히 통신판매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시장 개척을 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통신판매의 경우 소액 주문이 많아 취급 업무가 번잡할 뿐 수익성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 대안으로 대두된 것이 우표의 해외 판매를 대기업에 맡기는 것이었다. 세계 각국에 해외지사망을 갖추고 있는 대기업에 우표의 해외 판매를 맡기게 되면 그 실적이 폭증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그 방안이 긍정적으로 검토되었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선정된 기업이 럭키금성그룹의 종합상사인 반도상사였다.

반도상사를 거쳐 한국우취보급회로 이관하다

1980년 4월 체신부는 민간기업인 반도상사를 우표류 해외보급인으로 지정함으로써 오랜 기간 (재)체성회에서 맡고 있던 우표류해외보급사업은 반도상사로 이관되었다. 럭키금성그룹의 계열회사인 반도상사에서 우표의 해외판매 업무를 맡기로 한 것은 수출물량을 한 푼이라도 더 늘린다는 자체적인 계산에서였다. 체신부 역시 해외지사망을 갖춘 대기업에 맡기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 해외보급인을 변경했던 것이다.

해외보급인을 변경함에 따른 일시적인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그것을 변경하기 직전 해인 1979년의 해외보급 실적은 11만 8000달러였는데, 변경 이듬해인 1981년에는 24만 2000달러로 105%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판매 실적은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2년에는 26만 달러로 전해에 비해 7% 증가했음에도 1983년에는 20만 1000달러로 전해에 비해 오히려 22% 감소했다. 그 뒤 1984년에는 41만 9000달러로 대폭 증가했으나, 그 해에는 ‘필라코리아 84’라는 이름의 세계우표전시회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 해여서 예외적인 실적이라 할 수 있었다.

1970년대부터 북한은 우표를 통한 체제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북한은 공산 독재체제를 미화하는 각종 우표를 발행하여 미리 소인한 뒤 각종 홍보물과 함께 각국의 우표수집가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다시피 했다.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다양한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북한의 실상을 아는 우표수집가는 그 같은 우표에 현혹될 리 없으나, 무료로 제공하는 우표이다 보니 북한 우표만을 모으는 우표수집가도 더러 있었다.

1983년 1월 우표과장 자리에 앉은 윤범식은 그 같은 사실에 주목했다. 대안으로 추진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우표류의 해외 보급의 강화였다. 당시 우표류의 해외보급인으로 지정되어 있는 반도상사는 해외보급 방안의 일환으로 홍보물을 만들어 30여개 해외지사에 배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자 제품을 비롯한 공산품 판매가 전공인 해외지사 요원들이 그 나라의 우표수집가들을 알 리 없으니 엉뚱한 사람들에게 뿌리고 있었다. 반도상사의 우표류 해외 판매 실적이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우표의 해외보급을 그 분야의 비전문가인 종합상사에 맡기는 것이 비효율적임을 깨달은 우표과장 윤범식은 그것을 우취단체에 맡기기로 했다. 이에 앞서 우취단체연합회를 개편하기로 했다. 당시 우취단체연합회로는 한국우취단체총연합회가 있었는데, 그 단체는 1974년에 설립된 이후 활동한 실적이 거의 없어 유명무실한 단체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 단체를 개편하여 1984년에 개최되는 필라코리아 84 세계우표전시회를 주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단체로 육성하기로 하고, 1983년 8월 한국우취연합을 설립했다.

“마침 반도상사에서 우표류 해외보급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상무이사 오영인이 제 고등학교 동기였어요. 잘됐다 싶어 몇 차례 만나 해외 판매를 극대화하자며 격려하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매 실적이 올라가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 친구와 상의한 끝에 반도상사는 우표 해외보급에서 손 떼기로 하고, 우편법시행령을 개정하여 종합상사에 주게 되어 있는 해외보급인 자격을 한국우취연합으로 넘기기로 했던 거죠.”

우표과장 윤범식의 회고였다.

그러나 우표과장 윤범식이 그처럼 의욕을 가지고 설립을 추진했던 한국우취연합은 순조롭게 굴러가지 않았다. 전국 우취단체의 연합체인 한국우취연합은 회장에 럭키금성그룹의 총수 구자경, 부회장에 우취계의 중진인 이규봉과 강윤홍, 상무이사에 이동성을 앉히고 우표류의 해외 보급과 국내 보급, 월간 ‘우표’지 및 계간 ‘Korean Stamp Review’지 등의 발간 업무를 맡기는 한편, 필라코리아 84 세계우표전시회의 준비 작업을 맡기기로 했다. 그리하여 서울중앙우체국에 사무실을 마련해 주었다. 그처럼 우취인들로 구성된 단체였기에 원활하게 운영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출범했다.

우표과장 윤범식의 기대는 오래지 않아 실망으로 끝났다. 개성이 강한 우표수집가들의 단체이다 보니 말은 화려한데 제대로 추진된 일이 없었다. 소관 업무 중에서도 특히 세계우표전시회 준비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체신부와 공동 주최로 되어 있어 민간단체인 한국우취연합이 주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해 나갈 것으로 기대했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제반 계획을 체신부가 수립하고 체신부가 앞장서 이끌어 가야만 했다. 기금이 한 푼도 없는 단체이다 보니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정부 업무를 대행하는 단체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었다.

필라코리아 84 세계우표전시회가 열린 코엑스 전시장

“필라코리아 84 세계우표전시회 개최를 앞두고 발족한 우취연합이 손발이 되어 필라코리아 84의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체신부는 경비를 대고 후원만 해주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체신부가 앞장서 끌고 가야 했어요. 우취인 각자가 독불장군이어서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었어요. 서울중앙우체국에 사무실을 마련해 주고 상무이사 1인에 여직원을 확보해 줬음에도 수입과 지출을 계리하는 장부 하나 마련해 놓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했어요. 따라서 그런 단체에는 우표류 보급업무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별도의 한국우취보급회를 설립하기로 했던 거죠.”

우표과장 윤범식의 말이었다.

한국우취보급회를 거쳐 체성회로 되돌아오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우취연합을 설립한 목적은 우표류의 국내외 보급과 우취 관련 잡지의 발간 업무 등을 맡겨 우리나라 우취계를 이끌어 나가는 단체로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취연합의 운영을 우취인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책이 아님을 깨닫게 되자 체신부는 우표류의 해외 보급을 전담할 기관을 별도로 설립하기로 하고, 1985년 8월 재단법인 한국우취보급회를 설립했다. 그리하여 우표류의 해외 보급은 물론 국내 보급업무도 맡기고, 우표를 통해 한국의 문화와 발전상을 소개하는 영문 계간지 Korean Stamp Review의 발간업무도 맡겼다. 그러니까 한국우취연합에서 맡고 있던 업무 중 월간 ‘우표’지의 발행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업무를 우취보급회로 이관했던 것이다.

우취보급회는 이사장과 상무이사 밑에 국내보급과와 국외보급과를 두는 단순한 조직으로 출발했다. 이사장은 비상근인 우정국장이 맡고 있어 실질적으로 상무이사가 회사를 운영했다. 이사는 체신부 우표과장과 우정기획과장, 감사는 체신부조달사무소장이 맡았기에 사실상 체신부가 운영하는 회사라 할 수 있었다. 설립 당시의 자본금 2000만 원은 (재)체성회에서 출연했다.

우표류의 해외 판매를 우취보급회가 맡게 되면서 판매 실적이 급증했다. 이관된 해인 1985년에 27만 5000달러이던 것이 이듬해인 1986년에는 54만 7000달러로 100% 가까이 증가했고, 다음해에는 45만 5000달러로 17% 감소했으나, 1988년에는 83만 달러로 82%나 증가했다. 그 기간의 해외 판매액이 그처럼 급증한 것은 우취보급회의 설립으로 우표류의 해외 판매가 전문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1985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88서울올림픽 기념우표의 판매에 힘입은 바 컸다. 우표의 국내 보급은 판매 기간이 지난 우표를 관리 전환받아 판매하는 것이었는데, 판매량이 매년 꾸준히 증가했다.

1988년 우취보급회는 홍보과를 신설하며 기구를 확대하기도 했으나, 기금이 고갈된 탓에 운영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특히 1994년에는 만국우편연합(UPU) 서울총회와 아울러 필라코리아 94 세계우표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어 있었는데, 필라코리아 94 행사를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우취보급회의 기능을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취보급회의 재원을 확충할 마땅한 방안이 마련되지 않자, 1989년 8월 우취보급회를 해산하고 그 업무를 (재)체성회에 이관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체성회 내부 조직으로 우취보급부를 신설하고 인원 및 시설을 인수했다. 이에 따라 우표류의 해외보급업무는 또다시 체성회가 맡게 되었다.

그처럼 우표류 해외보급업무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역사는 돌고 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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