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우체국 각 서비스 바로가기 우표포털 본문내용 바로가기 우표포털 하단 바로가기

한국우표포털서비스 K-stamp

  • 우표배움터

    • 우표의역사
    • 즐거운우표수집
  • 우표정보

    • 한국우표
    • 세계우표
  • 우표시장

    • 우표장터
    • 온라인 구매
    • 오프라인 구매
  • 우표문화체험

    • 우표박물관
    • 우표전시회
  • 우표로보는세상

    • 해외우취소식
    • 우편 130년
    • 우표 명작을 말하다
    • 우정이야기
    • 우표수집정보
    • 시간여행
    • 우표디자이너 인터뷰
    • 우표 뒷이야기
    • 대한민국 방방곡곡
    • 우정문화웹툰
  • 어린이 우표세상

    • 우표야놀자
    • 청소년 우표교실
    • 우정문화 동영상
    • 우표배경화면
  • 인기
우표스쿨 우표갤러리 우표 샵 우표박물관 우표로 보는 세상 쥬니어 스탬프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콘텐츠는 한국 우편에 대한 역사를 소소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제목 인천우체국 130년의 역사를 되돌아본다.(2)
등록일 2014. 3. 27.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개항지 인천에 맨 처음 세워진 우체국은 우정총국 인천분국이 아니었다. 개항지 인천에서 우체국 업무를
먼저 시작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은 인천이 공식적으로 개항되기 전부터 왕래했는데, 그들의
편의를 위해 일본영사는 1882년 영사관 내에서 우편 사무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수 명에 불과한 시절이어서 공문서를 제외하면 발송해야 할 우편물이 거의 없었다. 이듬해
인천이 개항되고 일본 조계가 설치되면서 일본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되자, 그 해 12월 우편 업무를 개시
한다고 공포하고 1884년 4월 우편국을 설치했다. 당시는 우편국을 별도로 짓지 않고, 영사관 관사 중에서
빈 방을 골라 제9호동을 우편국으로 사용하고, 영사가 우편국장 자리를 겸임했다.
인천영사관내 우편국은 1888년 한성에 있는 일본공사관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
에게 우편 이용의 편의를 제공했다.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우편제도가 실시되지 않고 있던 때인지라,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일본 우편국을 이용했다. 그 뒤 일본 우편국에서는 전신 업무까지 취급했다. 1896년 인천영사관내 우편국은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했다.
1884년 4월은 우리나라가 우편제도를 실시하기
전이어서 일본이 남의 나라 땅에서 우편제도를 실시
했음에도 항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편
사업을 개시할 준비를 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고종으로부터 우정총국을 개설하라는 칙령을 받고
우정총국의 개국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홍영식은 일본 영사관우편국에서 취급하고 있는
우편업무를 인수할 채비를 하고 있었음을 일본인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우정총국 설립 당시 조선
정부에 고용되어 개국 업무를 도왔던 일본인 스가노(菅野宏一)는 우정총국 개국 당시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한력(韓曆) 1884년 10월 1일(양력 11월 18일) 경성에서 인천 사이의 선로를 개통하고 나아가 신년 1월
2일까지는 경성에서 부산까지의 선로를 설치하려고 오비(小尾輔明)는 이 달 중순부터 그 지리를 답사
하기 위해 우정총국 사사 신낙균과 함께 험로를 무릅쓰고 부산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까지
인천의 일본영사관에서 취급하던 우편사무를 이번 우정총국에서 인수 취급하는 수속을 먼저 매듭짓기
위해 이 달 1일(음력 10월 14일) 우선 인천항으로 떠났다.”
위의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우정총국에서는 이미 인천의 일본영사관 내에 설치되어 있는 불법적인 일본
우편국의 업무를 인수할 작업에 착수했음을 알 수 있다. 1933년 일본인이 발행한 인천부사에는 “1885년
1월 일시 본방(本邦) 이외의 인민 앞 우편물은 조선 우정국에 교부했다.”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일본
우편국에서도 일본 외의 지역으로 가는 우편물은 우정총국으로 넘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일합병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1910년이었으나, 통신권을 빼앗긴 것은 그보다 5년 전인 1905년이었다.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로 작정한 일본은 그 해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의 체결을 강요
하여 우리나라 통신권을 강탈했다. 그리하여 국내에 있는 우체사와 전보사, 전화소 등 통신기관을 이미
국내에 설치되어 있는 일본 우편국과 통합하여 운영했다. 이에 따라 인천우체사의 명칭이 인천우편국
으로 바뀌었다.
통신기관 통합의 원칙은 일본 우편국이나 출장소가 설치되어 있는 지역에서는 한국 우체사를 그들
기관에 통합시키고, 일본 우편국이나 출장소가 설치되어 있지 않는 지역에서는 새로운 우편국을 설치
한다는 것이었다. 인천의 경우, 일본 우편국은 이미 설치되어 있고, 우리나라 우체사와 전보사 역시 설치
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통합되었던 것이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개항지 인천은 빠르게 발전했다. 특히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과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거치는 동안 인천은 일본인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모했다. 인천항은 원래
시가가 좁고 지형이 경사져 도시를 확장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러일전쟁마저 승리로 이끌면서
일본인 거류민은 날마다 증가하여 살 집도 없고 집 지을 땅도 없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해군 묘지를
개장하고 그 땅을 판 토사로 공원 밑의 해수면을 매립했다. 공동묘지 일부를 밀어 택지를 조성하는 한편,
인근의 바다를 매립하여 새로운 시가지를 형성했다.
1923년 12월 인천우편국은 중구 항동에 있는 매립지에 2층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인천의 인구가 증가
하고 우편 이용자가 급증함에 따라 보다 넓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으로 이전했던 것이다.
서양식으로 새로 지은 인천우체국 건물은 이색적인 모양에 품위가 있었다. 서양식 건축 양식과 일본식
건축 양식을 적절하게 섞어 지은 건물이어서 당시로서는 첫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화강암을 거칠게
다듬은 방식으로 처리해 기단처럼 보이게 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올린 2층 벽돌조 건물이었다. 관공서
건물로는 크고 우아한 멋이 있어 단박 인천의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두산백과사전은 그 건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 무렵 유행하던 절충주의 건축 양식을 단순화한 건물로서, 총 면적이 1,787㎡(약 540평)이다. 입구
양쪽에 큰 기둥 형식의 탑부(塔部)를 세우고, 그 사이에 주두(柱頭: 기둥머리를 장식하며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도록 짜여진 넓적한 나무)가 없는 여러 개의 기둥을 받쳤다. 당시의 관공서 건물은
윗부분에 돔 모양의 탑옥(塔屋)을 올려놓은 것이 일반적인데, 이 건물은 이를 생략하는 등 평면과 세부적
외양이 기본 형식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전체적 구조는 벽돌조인데, 바닥은 콘크리트로 시공하였다.
외부 마감은 징두리(건물 안팎 둘레의 밑동 부분)에만 화강암을 2단으로 쌓고 나머지 윗부분에는
모르타르로 석조 모양을 표현하였다.
6·25전쟁 때 일부가 파손되어 슬래브 지붕을 슬레이트로 보수하는 등 1957년 복구공사를 마쳤다.”
일제시대 내내 인천우편국이라 불렸던 이 우체국의 명칭이 1949년 8월 인천우체국으로 바뀌었다. 우편
분야의 현업기관인 우체국의 애초의 명칭은 우체사였다. 1905년 일본에 통신기관을 강탈당하면서 그
이름이 일본식인 우편국으로 바뀌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초창기의
이름과 비슷한 우체국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인천시는 1982년 3월 이 건물의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하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했다.
우체국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받은 것은 그 건물을 소중하게 보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실제로
그 건물을 사용하여 우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우체국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
아니었다. 청사가 좁고 낡아 보수공사를 해야 함에도 마음대로 손질할 수 없었다.
2003년 4월 우정사업본부는 인천우체국을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에 신축한 건물로 옮기고 그 건물의 보수
작업에 착수했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건물의 모양을 바꾸는 외곽공사는 할 수 없기에 내부 공사만
했다. 그 자리에서 취급하던 우편업무를 중단할 수 없어 인근 신포동에 출장소를 개설했다.
2년 가까운 공사 기간을 거쳐 2005년 1월 1일 그 우체국에서 업무를 재개했다. 인천우체국이라는 명칭과
관내우체국에 대한 감독 기능은 이미 연수동에 세워진 새 우체국으로 이관되었기에 우체국의 기능을
대폭 축소하여 6급우체국으로 문을 열었다. 그 명칭도 ‘인천중동우체국’으로 바꾸었다.
2005년 1월 인천중동우체국으로 개명하고 다시 업무를 시작한 인천우체국
우체국의 명칭을 인천중동우체국으로 고친 것은 6급우체국의 경우 그 이름을 동명에 따라야 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그 규정대로 한다면 그 우체국이 소재한 위치가 항동6가 1번지이므로 항동우체국
이라 불러야 마땅함에도 항동우체국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우체국이 관할하는 지역이
인천광역시 중구와 동구 일대이기에 중구와 동구를 합쳐 인천중동우체국이라 작명했다고 한다.
그처럼 120여년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며 인천의 명소로 오랫동안 인천 시민의 사랑을 받아온 인천
우체국이 어느 날 갑자기 인천중동우체국이라는 낯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밖에서 보는 우체국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감독국의 자리를 양보하면서 이름마저 빼앗겼던 것이다.
이에 대한 인천 시민들의 반응이 고울 수는 없었다. 연수동에 넓게 지은 새 건물에 감독국 기능을
부여하고 인천우체국이라는 이름마저 갖다 붙인 것은 행정 편의일 뿐 오랫동안 그 우체국을 이용해 온
시민들의 정서와는 무관했다. 시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체국의 취급 업무가 어떻게 달라지든 인천의
명물인 인천우체국이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보다 편하고 친근감 있을 것이다.
“우체국과 같은 관공서의 명칭을 짓거나 개정하려 할 땐, 첫째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하느냐, 둘째
지리적인 사실과 부합하느냐, 셋째 주민들이 정서적으로 수용할 수 있느냐는 등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인천우체국을 인천중동우체국으로 개칭한 것은 행정
편의일 뿐 인천 시민들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우체국이라는 역사로 보나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인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건축물로서의 가치
등을 고려할 때, 인천우체국이라는 명칭은 반드시 복원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천지역의 향토사학자 조우성은 그렇게 강조했다.
귀 담아 들어야 할 말이라 하겠다. 개항과 함께 130년 동안 인천 시민들과 동고동락하며 인천의 발전상을
지켜보아 온 그 건물의 역사적 상징성이나 문화재로서의 가치 등을 감안할 때 그 이름을 복원시킴이
마땅하다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우체국이, 그것도 아름다운 외관 덕분에 문화재로 지정된
우체국이 감독 기능을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이름마저 빼앗겨서야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인천중동우체국은 2009년 4월 5급국으로 승격하여 집배업무를 취급하고 있다.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이전글 다음글 보기
이전글 인천우체국 130년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다음글 또다시 파문을 일으킨 독도우표

기 발행된 모든 우표류(우표, 엽서, 원화, 우표책, 우표첩, 날짜도장)의 이미지 및 내용을 사용할 수 있으나, 이미지와 내용을 변경하여 사용시에는 우정사업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