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한매일신문과 배설 |
---|---|
등록일 | 2022. 7. 28. |
첨부파일 | 첨부파일없음 |
배설(裵說)은 영국인 Ernest Thomas Bethell(1872~1909)의 한국 이름이다.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은 영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17세인 1888년 일본 神戶(고베)에서 무역회사에 근무했다. 그 뒤 16년 동안 일본에서 무역업을 하며 부를 축적했다. 1904년 3월 영국 『Daily Chronicle(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통신원으로 러일전쟁 취재차 우리나라에 왔다. 한 달후 베델이 취재한 덕수궁 화재사건이 「한국 황궁 화재」라는 기사로 데일리 크로니클 4월 16일자 5면 톱으로 보도되었다. 신문기자로서 첫 번째 특종이었으나 얼마 후 특별통신원에서 해고되었다. 베델은 특별통신원을 그만두면서 양기탁(梁起鐸, 1871~1938), 코웬(Thomas Clark Cowen)과 함께 신문 창간에 나섰다.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라는 제호로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한글판 2면, 영문판 4면으로 6면이다. 국한문혼용판과 한글판은 양기탁・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이 맡고, 영문판 제작은 영국 『The Times(더 타임스)』 한국주재통신원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던 미국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가 도와주었다. 뒤에 국한문혼용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Korea Daily News(코리아 데일리 뉴스)』로 분리되어 각 4면으로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문은 을사늑약 체결에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張志淵)의 체포와 이를 게재한 황성신문 정간을 보도하고, 석방과 복간을 촉구하는 글을 썼다. 베델의 조선인들을 선동했다는 치안방해 혐의로 열린 재판 결과가 6개월 근신에 그쳤다. 공금횡령 혐의를 덧붙여 영국 정부는 3주간 실형을 선고했다 조선에는 영국인을 구금할 시설이 없어 중국 상하이까지 실려 가 수감생활을한 베델은 급격히 건강이 나빠진 채 돌아왔다. 1909년 5월 베델은 심근비대증으로 37세에 숨을 거둔다. 고종 황제는 “하늘도 무심하지,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天下薄情之如斯呼)”라며 애통해했다. 1907년 일본 궁내대신이었던 田中光顯(다나카 미스야키)가 개성 경천사지십층석탑(국보 86호, 13.5m)을 일본으로 무단 반출했다. 일본이 조선의 석탑을 약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델과 헐버트는 대한매일신보와 『New York Post(뉴욕 포스트)』 등에 지속해서 약탈 사실을 폭로했다. 결국 탑은 11년 만에 환수되었다. 베델의 헌신과 사랑이 담긴 탑은 1978년과 2021년에 우표에 담겼다. 2004년에는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인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을 기념한 엽서가 발행되었다. 다음 달에는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으로 베델과 헐버트가 선정되어 우표로 발행될 예정이다. 1950년 우리 정부는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인정하여 한강 변 양화진 외국인 무덤에 묻힌 베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게 하시오.” 베델의 마지막 말이다. |
이전글 | 햇빛처럼 달빛처럼 찬란하고 은은하게 |
---|---|
다음글 | 반려동물과 고양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