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은 영의정의 아들로 태어나 18세에 대과에 급제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린 나이에 관직을 맡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왕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했다. 2년 더 공부해 관직에 오른 그는 3년 만에 정5품 교리, 그 2년 후에는 참의에 이르렀다. 참의는 정3품 당상관직으로 지금으로 치면 차관보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다시 2년 뒤에는 문치주의 조선 양반 관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홍문관부제학에 올랐고, 그 2년 뒤에는 병조참판과 함께 우정총판에 제수됐다. 9년 만에 지금의 차관 직으로 고속승진한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9세였다.
정보통신의 날인 4월 22일은 고종이 1884년 20대의 젊은 병조참판 홍영식에게 우정총국을 설립하라고 전교한 날이다. 홍영식의 세심한 준비 속에 그해 11월 18일 우정총국이 정식으로 개국돼 우편 업무가 시작되고, 12월 4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우정총국 청사(사적 제213호)의 개업 축하연이 거행된다. 여기서 그의 운명과 조선의 역사는 중대한 갈림길에 선다.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는 두 가지 의혹을 남긴 채.
‘…박영효, 김옥균 등과 독립당을 조직하고, 이듬해 우정국의 낙성식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혁신 내각의 우의정이 되었으나, 삼일천하로 끝나고 대역 죄인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홍영식에 대한 기술이다. 두 가지 의문점은 정변 이튿날 그가 받은 관직과 그 다음날 그가 맞이한 죽음에 대한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 실려 있는 내용은 이와 사뭇 다르다.
‘정변 후 홍영식은 신정부의 좌우영사 겸 우포장에 제수되었다가, 곧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3일 만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지도층 대부분이 일본에 망명한 것과는 달리, 박영교와 함께 국왕을 호위하다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우의정과 좌의정, 처형과 살해, 두 가지는 분명히 다르다. 각종 사전류를 비롯한 많은 자료는 홍영식이 우의정에 올랐고 처형되었다고 적고 있다. 경기도 여주군은 흥천면 문장리에 있는 홍영식의 묘를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묘 안내문에도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우의정이 되었으나 3일 만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무너지고 대역 죄인으로 사형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묘비와도 상치된다. 비문의 내용 중 우의정에 오른 부분은 안내문과 같지만 사인은 ‘청병에 의해 무참히도 살해되니’라고 다르게 적혀 있다.
홍영식의 최후에 대해서는 처형이 아닌 살해 쪽의 자료나 정황이 오히려 더 많다. 김옥균의 <갑신일록>과 박영효의 <갑신정변> 등 정변 주역의 일기가 살해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후손인 홍석호씨도 여러 자료를 통해 살해된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고, <갑신년의 세 친구>의 작가 안소영씨도 소설 첫머리에 그가 살해되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했다. 좌의정이냐 우의정이냐 하는 논란도 마찬가지다. <갑신일록>에 기록된 조각 내용은 홍영식이 좌의정, 박영효가 전후영사 겸 좌포장, 김옥균이 호조참판 등으로 되어 있다. 최근 출간된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안승일 지음, 연암서가)에도 좌의정 및 살해 쪽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뒷날 홍영식에게 내려진 형률은 모반대역부도 능지처사였지만 이미 죽어 묻힌 뒤라 집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시신은 죽은 지 이틀 뒤 형인 홍만식이 수습해 경기 하남 신장에 묻었다가 1903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일본 망명 선택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홍영식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원되어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대제학에 증직됐다. 고종은 그에게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