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12월 스웨덴의 신문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부산항에 내렸다. 러·일전쟁 취재차 일본 도쿄에 왔다가 영국 무역상으로 위장해 현해탄을 건넌 것이다. 여기서 경부선을 타고 서울로 간 그는 한반도 구석구석을 여행하 면서 보통 사람부터 고종까지 만났고, 여기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I KOREA>라는 책(한국어 완역본은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조선을 걷 다>)으로 썼다. 이 책에 당시 우체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어 흥미를 끈다.
“이단의 나라에서 한국말 외의 말이 통할 리 없다. 어딘가엔 말이 통하는 데가 있을 것이며, 그곳이 바로 우체국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우체국이란 말을 이해시키지? 곰곰이 생각하자 한 가지 묘안 이 떠올랐다. 지갑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들고 주머니에 간직했던 사전을 펴 ‘우표’라는 단어를 찾다가 적절한 문구를 발견했다. ‘우표 한 장 붙여라’(Oo-ppyaw han chang put-t’chorah). 잔뜩 긴장해 보 고 있던 군중들이 폭소를 터뜨렸고, 비로소 이해가 된 인력거꾼들이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우체국장은 아주 젊은 사람이었다. 예기치 못한 놀라움이 그의 얼굴 에서 가실 줄 몰랐다. 그는 서투른 프랑스어를 쓰며 나를 기꺼이 안내하려 했다 .”
외국 여행을 하다 길을 모르면 우체국을 찾으라는 말이 있다. 인포 메이션이 없는 외진 곳에도 우체국이 있고, 우체국은 어느 나라에서든 친절하다 는 게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들의 경험칙이다. 이 책을 보면 100년 전에 이미 그런 전통이 있었다는 얘기다. 또 하나 눈에 띄는 대목은 당시 우체국장이 서툴 지만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외국과 담 쌓고 지내다 막 문 을 열기 시작한 시절, 일개 우체국장이 어떻게 프랑스어를 다 배웠을까.
<정보통신 역사기행>(이기열 저)이란 책에 따르면 당시 구 한 국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만국우편연합(UPU) 가입이었고, UPU를 비롯한 당시 국제 공용어는 프랑스어였다. 정부는 곧 실시할 국제우편에 대비해 프랑스 체신 성에 근무하던 클레망세를 우체교사로 스카우트해 직원들을 교육시켰고, 인천·목포·원산·부산 등 항구 우체국에 프랑스어를 배운 사람들을 배치했다. 그러니까 아손은 이 중 한 명을 만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 다.
100년 전과 달리 요즘에는 의사소통이 안된다고 해서 우체국을 찾는 외국인은 그다지 없다. 우체국장이 굳이 외국어에 능숙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 하지만 잘해서 나쁠 것은 없다. 우체국장이 영어에 능통하면 고객들에게 보너 스 서비스를 줄 수 있다. 국제우편을 부치고 받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
최근 우정사업본부가 펴낸 우정가족 미담사례집에 보면 아손 그렙스 트가 100년 전 우체국장을 만났을 때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함께 펼치는 희망의 날개>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사례집에 따르면 전 북 전주시 인후동우체국장 김종익씨는 매주 토요일 지역주민센터에서 무료 영어 강좌를 연다. 벌써 20여년째 해오는 강좌이다보니 주민들 사이에 인지도도 높고 김씨의 제자도 많다. 한번은 택시기사가 외국인 여성손님과 실랑이를 벌이다 우 체국에 왔다. 외국인 손님이 병원에 가자고 해 데려갔는데 무슨 영문인지 병원 에 도착하면 그곳이 아니라며 화를 낸다는 게 택시기사의 하소연이었다. 영어통 역사 자격이 있는 김씨가 들어보니 외국인 손님은 종합병원(Hospital)에 가자고 했는데, 병원과 의원을 구분할 줄 모르는 택시기사가 의원(Clinic)으로 데려가 자 외국인 손님이 바가지 씌우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김씨가 둘의 오해 를 풀어준 뒤로는 인후동 주민들 사이에 ‘영어가 필요하면 우체국에 가면 된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한다.
미담사례집에는 이밖에도 KTX 열차 안에서 현금과 수표 1억2000만원 이 든 가방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준 부산체신청 박장수 국장의 돈의 유혹에 넘 어가지 않은 이야기, 강원 정선의 농촌마을에서 우편물을 배달할 때 어르신들의 기분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는 ‘노래하는 집배원’ 민병철씨 이야기, 보이스피싱에 속아넘어가 거액을 잃을 뻔한 손님을 순간적인 재치로 구해낸 전 남 여수 선원동 우체국 강은영씨 이야기 등 감동적인 스토리들이 꽉차게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