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역설적이지만 느림의 미학도 뜬다. 디지털 세상에서 빠른 것만 좇다 보니 아날로그 세계의 잃어버린 가치가 소중하게 여겨지는 심리 때문이다. 인스턴트 음식 안 먹기나 걸어서 여행하기, 아마존 밀림 개발 않고 보전하기 같은 운동이 이런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손으로 꾹꾹 눌러 쓰는 손 편지도 느림의 미학에 꼽힐 만하다. 손 편지, 아니 꼭 손으로 쓰지 않아도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집어넣는 편지는 미국에서 ‘달팽이 편지’(스네일 메일)라고 부른다. 전달 속도가 달팽이 기어가듯 느린 것에 빗댄 말이다. 인터넷 사전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달팽이 편지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1981년이다. 미국 TV 만화영화에서 주인공이 예정보다 편지를 3주 늦게 받게 됐을 때 “달팽이가 좀 느리잖니”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이게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0년에 나온 <개구리와 두꺼비는 친구>라는 동화책에도 개구리가 두꺼비에게 보내는 편지를 달팽이에게 주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달팽이를 느림보에 비유하는 관습은 더 오래됐다. 우리는 달팽이보다 굼벵이를 느림의 대명사로 쓴다.
요즘 미국에선 달팽이 편지 예찬론이 심심찮게 나온다.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에 ‘달팽이 편지를 사용해야 하는 10가지 이유’라는 글이 올라오자 곳곳에서 퍼나르기를 해 갔다. 여기서 그 이유를 인용해 보자.
첫 번째 달팽이 편지는 받는 사람을 흥분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이 심사숙고 끝에 쓴 글이든 아니든 한 개인의 편지를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특별하고 설레는 기분을 준다.
두 번째 사탕을 넣거나 예쁘게 디자인할 수 있다. 생일 같은 특별한 날 봉투 안에 별이나 사탕을 넣어 놓으면 감동의 서프라이즈가 된다.
세 번째 프라이빗하다. 이메일과 달리 우체국을 통해 전해지는 편지는 중간에 누가 가로채서 읽을 가능성이 훨씬 적다.
네 번째 필터에 걸리지 않는다. 달팽이 편지도 송달 과정에서 사라지는 수가 있긴 하지만 이메일보다는 분실 가능성이 훨씬 적다. 이메일은 스팸메일 필터기에 걸려 통째로 날아가곤 한다.
다섯 번째 분별없는 결정을 피할 수 있다. 이메일은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써서 보내기 쉽다. 손 편지에서는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여섯 번째 다양한 아이템을 보낼 수 있다. 달팽이 편지에는 그림이나 사탕, 개인의 손때가 묻은 물품 등을 하나로 묶어 보낼 수 있다. 이메일은 이런 것을 보낼 방법이 없다.
일곱 번째 정성이 들어간다. 손 편지를 쓸 때는 생략된 단어를 쓰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정확한 단어로 정성들여 표현하게 된다.
여덟 번째 바이러스가 없다. 달팽이 편지를 통해 바이러스를 전파시키는 일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가능성은 아주, 극히 적다.
아홉 번째 포워딩 사고의 위험이 없다. 이메일은 클릭 몇 번으로 목록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포워딩을 쉽게 할 수 있다. 내용이 중요하고 보안이 필요하다면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불행하게도 이메일 발송에는 이를 취소(undo)할 수 있는 버튼이 없다.
열 번째 돈 관리에 유용하다. 청구서가 날아왔는데 현금이 부족하거나 통장에 돈이 들어오려면 며칠 기다려야 할 때 체크(수표)를 끊어 달팽이 편지로 보내면 된다. 청구인의 독촉이 있으면 “우편으로 체크 보냈어요”라고 하면 된다.
이 가운데 마지막 항목은 우리와 맞지 않다. 대금 지불을 수표로 하는 미국과 같은 관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가지는 예외없이 적용된다.
지난해 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손 편지에 대한 노스탤지어’라는 기사에서 손 편지에 대한 향수가 일어 실제 손 편지 쓰는 사람이 늘고 있는 추이를 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택사스 주의 한 여성은 이메일이 생겨나기 전에 남편이 할머니에게 매주 편지 쓰던 일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스웨덴 스톡홀름의 한 주민은 페이스북과 안녕을 고한 뒤 집에 근사한 편지지와 여러 색의 컬러펜, 여러 액면가의 우표를 마련하고는 달팽이 편지를 받을 친척을 고르고 있다. 손 편지는 이제 느림의 미학에서 정성의 미학, 감동의 미학으로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