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온다. 홍범도 장군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무장독립투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기념비적 인물이다. 그의 유해는 카자흐스탄에 있다. 정부는 3월 중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국내로 봉환하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할 계획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카자흐스탄 정부의 협조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됐다”고 말하면서 유해 봉환 소식이 알려졌다.
사실 카자흐스탄과 수교한 1992년부터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이 추진됐다. 봉환이 20년이나 걸린 데는 여러 사연이 있다.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큰 게 중요한 이유였다. 홍범도 장군은 아직도 카자흐스탄 동포사회의 정신적 지주다. 홍 장군은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군에 쫓기다 연해주를 거쳐 자유시(현재 스보보드니)까지 가게 됐다. 그 과정에서도 항일단체 통합을 주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무장독립투쟁 사상 가장 비극적 사건인 ‘자유시참변’을 당했다. 일본의 회유에 넘어간 소비에트 적군에게 궤멸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은 와해하다시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00㎞ 떨어진 자유시까지 이동하는 동안 전력이 크게 약화된 탓이다. 홍범도 장군도 소비에트 적군에게 붙잡혀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도 홍 장군은 집단농장을 운영하며 한인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이를 기려서 동포사회는 고려인들은 크질오르다에 장군의 묘역을 조성하고, 그를 민족 지도자로 기렸다. 카자흐스탄 정부 역시 1994년 ‘홍범도 장군 거리’를 선포할 정도로 장군을 존중하고 있다.
또 북한의 평양 송환 요구도 카자흐스탄 정부의 빠른 결정에 장애가 됐다. 홍범도 장군의 고향은 평양이다. 공산당 입당 전력과 연고를 내세운 북한이 한국으로 봉환을 방해했다. 홍범도 장군의 후손이 모두 세상을 떠난 것도 송환 결정이 늦어진 이유다.
늦어진 만큼 봉환 소식이 반갑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올해가 바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전승 100주년이다. 이 두 번의 전투는 독립운동사에서 최초의 승리이자 최고의 전과로 기억되고 있다. 이 두 전투를 진두지휘한 사람이 바로 홍범도 장군이다. 특히 임시정부는 봉오동전투를 ‘독립전쟁 1차 대승리’, ‘독립군 3대 대첩’이라고 규정했다. 역사적 맥락이 그런 규정을 낳았다. 3·1운동 이후 조직적인 독립군의 무장항쟁을 촉발했다. 뿐만이 아니다. 봉오동전투를 시작으로 독립군 부대의 연합작전이 전개된다. 신식 무기와 대포로 무장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와의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했다. 300여 명에게 상처를 입혔다.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자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다. 대승이었다.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은 만주지역의 한인 독립군 초토화 작전에 나섰다. 1920년 10월 4만 명의 병력을 앞세워 토벌에 나선 일본군과 독립군은 만주 청산리에서 맞붙는다. 대한독립군을 지휘한 홍범도 장군과 북로군정서군을 이끄는 김좌진 장군 연합군은 청산리 백운평·천수평·완루구 등에서 10여 차례 전투를 벌였다. 독립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100주년을 앞두고 우정사업본부도 이 두 전투와 관련한 기념우표 발행을 준비하고 있다. 두 전투가 ‘전승의 신화’로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항일독립운동은 후손으로서 자랑해야 할 정신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