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역병과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주기적으로 대역병의 유행(팬데믹)에 시달렸다. 천연두는 잉카와 아스테카 문명을 삼켰다. 중세에 유행한 페스트는 당시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사지로 몰았다. 19세기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인도와 아시아 대륙에서 1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리도 전염병의 피해와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조선왕조실>에 ‘역병(전염병)’이라는 기록은 무려 1455건이나 나온다. 콜레라는 우리 역사에 가장 파괴적인 전염병 중의 하나였다. 콜레라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1821년(순조 21년)에 상륙했다. 조선시대 때 콜레라를 호열자(虎列刺)라고 했다. 호랑이가 육체를 찢는 듯한 고통이라는 뜻이다. 이 병으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병에 걸리면 10명 중에 한두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라고 적고 있다.
콜레라의 제2차 습격은 일제강점기에 있었다. 이때 콜레라를 ‘화독(和毒)’이라고 했다. 일본 사람들이 갖고 들어온 병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연유가 있다. 일본 경찰은 환자 색출이라는 명목 아래 길가는 남성의 바지를 벗겼다. 콜레라 증상 중 하나인 설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전염이 의심되면 무조건 끌어다가 막사에 격리했다. 물론 그곳은 의료시설이 아니다. 난방시설도 없었다. 방치된 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이곳에서 죽은 사람은 ‘얼음귀신’이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전염병 치료제로 우표가 등장(?)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끝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한반도에 말라리아가 대유행했다. 이때 말라리아 환자에게 내린 민간요법이 바로 ‘우표 처방’이다. 우체국 소인이 찍힌 우표를 태운 재를 냉수에 타서 마시거나 환자의 등에 우표 석 장을 붙이는 것이었다. 우표는 곧 관청이고 일본인의 힘이었다. 무서운 관청과 일본 경찰의 힘을 빌려 말라리아를 치료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 민중의 무지몽매를 탓하기에 앞서 관청과 일본 경찰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이런 민간요법이 유행했을까.
우표가 ‘치료 효과’를 나타낸 것은 1930년부터다.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전문 요양원을 만든 의사 겸 선교사 셔우드 홀이 조선인 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덕분에 1965년 5.3%이던 결핵 위험률이 2004년에는 0.25%로 떨어졌다. 우표가 결핵의 공포를 씻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질병 특히 대역병은 역사의 한 부분이다. 우표는 역사를 기록한다. 1962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추진한 ‘말라리아 박멸 운동’을 기념한 우표가 우리나라를 비롯해 인도 등 전 세계에서 발행됐다. 말라리아의 전염원은 말라리아와 말레이 사상충을 옮기는 학질모기다. 그런데 우리나라 우표디자인이 문제가 됐다. ‘학질모기’가 아닌 ‘뇌염모기’를 그려넣은 것이다. 학질모기는 머리를 처박고 꼬리를 들고 있다. 우표에 디자인한 모기는 수평으로 앉은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말라리아 박멸운동 기념우표는 ‘엉터리 우표’라는 오명을 얻었다.
전염병과 관련한 가장 최근에 발행한 우표는 2002년 중국에서 발원해 전 세계에 전파된 사스(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에 관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사스 퇴치 과정에서 순직한 의료 인력에 ‘인민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일명 ‘제3의 영웅’이다. 종전에 중국의 영웅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중국 공산당 창당 및 발전을 도운 ‘창건영웅’만이 존재했다. 목숨을 걸고 사스와 싸운 의료진을 ‘인민을 구한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그들을 기리기 위해 2003년 5월 ‘사스 퇴치의 영웅’을 우표로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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