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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최초

집단이 형성되고 개개인을 연결해 주는 통신수단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우편은 등장과 함께 급성장하게 됩니다.

문위우표의 탄생

우리나라 신식 우편 제도의 아버지로 불리는 홍영식(洪英植)을 중심으로 한 신진개혁파 정치 지도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1884년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우정총국이 역사적인 업무를 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문위우표는 이때 발행된 우표의 액면이 당시의 화폐 단위인 ‘문(文)’이었기 때문에 수집가들 사이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첫번째는 문위우표 5문 이미지이다. 발행일은 1884년 11월 18일. 두번째는 문위우표 10문 이미지이다. 발행일은 1884년 11월 18일. 우표 아래쪽 여백에 우표를 인쇄한 곳(명판)인 '대일본제국정보 대장성인쇄국제조'라는 문자가 보인다. 세번째는 우정총국이 페쇄될때까지 도착이 안되어 사용하지 못한 우표 3종 이미지이다. 25문, 50문, 100문. 네번째는 우리나라 최초의 날짜도장 한성우체사 날짜도장, 인천우체사 날짜도장 이미지이다.
우리 정부에서 5종의 우표 인쇄를 일본 대장성인쇄국에 의뢰하고, 우정총국의 개국과 동시에 우표를 발매할 예정이었으나, 우정총국 개국일까지 5문과 10문 2종만 도착해 한성(서울)과 인천 간에 운송된 우편물에 사용되었을 뿐, 나머지 25문과 50문, 100문의 3종은 같은 해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이 폐쇄될 때까지 현품이 도착하지 않아 미발행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근대 우정의 창시자 홍영식

근대 우정의 창시자 홍영식. 금석 홍영식 선생(1855년~1884년) 우표 발행일은 1999년 11월 15일이다.
홍영식(洪英植)의 본관은 남양으로 철종 6년(1855년) 12월 29일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호는 금석(琴石)으로 남달리 총명하여 18세의 나이로 칠석사(七夕試)에 급제한 영재였다고 합니다.
금석 홍영식은 개화의 선각자로서 한국 근대 우편과 통신의 창시자이자 신식 문물 도입의 주역이었습니다.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1884년 12월)을 일으켜 급진적인 개화를 시도하였으나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외국으로 망명하라는 동지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고종을 호종(護從)하던 중 창덕궁 담 너머 옥류천 상류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청병에 의해 피살당하고 말았습니다. 1895년 갑오경장 후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어 주는 신원(伸寃)을 받았으며 1910년에는 규장각 대제학의 추증(追贈)으로 충민공(忠愍公)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20여 일의 단명에 그친 근대 우편제도

1884년 11월 18일 우정 사업 개시와 함께 대한민국 최초로 발행된 문위우표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같은 해 12월 8일 왕명에 의하여 폐지됨으로써, 모처럼 이룩한 신식 우정 사업제도와 함께 불과 20여 일 만에 그 명을 다하게 됩니다.

우정 사업을 시작한 지 18일째인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개화파의 홍영식,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이상재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는 개화당 일파의 몰락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이에 연루된 사람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고,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그동안 오간 서신 등 물증이 될 만한 것은 철저히 없애거나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당시에 사용한 우편물의 실체봉투나 우편 사료가 될 만한 물증이 없는 실정입니다.
우정총국 청사(종로구 견자동)와 그 당시의 우체통 이미지이다.